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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법흥왕, 일통삼한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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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에 있는 신라 제23대 법흥왕의 능이라고 전해오는 무덤이다. 경주의 서악이라 불리는 선도산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의 내부구조는 알 수 없는데 겉모양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삼국시대 신라 왕릉으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무덤의 아래쪽에는 냇돌로 쌓은 둘레돌(무덤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역할)이 드문드문 들어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재위 27년에 죽으니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삼국유사에서도 왕의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 이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있는데 애공사지탑(효현리 3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신라 법흥왕릉(新羅法興王陵) 사적 176호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왕들의 능묘 위치를 살펴 보면 신라 22대 지증왕(500~514)까지는 오릉·미추왕릉·내물왕릉을 제외한 다른 왕들의 무덤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된 것이 없는데, 법흥왕 이후부터 신라 왕들에 대해서는 왕릉의 위치나 장례지가 주변에 있던 사찰을 중심으로 방위나 산 이름 또는 지역명 등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증왕과 법흥왕 사이를 경계로 한 이러한 기록상의 차이는 바로 왕릉들의 입지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신라고분은 6세기 초를 중심으로 그 이전까지는 평지에 돌무지덧널무덤이 축조되었으나, 그 뒤부터는 산기슭으로 옮겨지고 내부구조도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뀐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법흥왕릉 부터 시작되는 신라 왕릉의 소재지에 대한 기록은 바로 신라고분이 변화하는 과정을 문헌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법흥왕부터 신라의 왕들의 무덤이 평지에서 산지로 이동하는 것은 이 때 공인된 불교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도 보인다.

법흥왕은 신라 제23대 왕(재위 514540)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원종이며 지증마립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연제부인 박씨이고, 왕비는 보도부인 박씨이다. 키가 7척이나 되고 마음이 너그럽고 넓었으며 백성들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지증왕 때부터 시작된 정치 개혁을 이어 받아 신라를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로 완성시킨 왕이다.

517년에 병부(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곳)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고대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520년에는 율령(형법과 법에 의한 명령)을 반포하고 백관(벼슬아치)공복(벼슬아치들이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옷)을 정하였다.

531년에 상대등(지금의 수상과 같은 역할)을 설치하였는데 이찬(17관등 중 두 번째 관등) 철부가 최초의 상대등이 되었다.

법흥왕은 안으로 나라의 질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밖으로는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에 백제의 압박에 반발한 대가야 왕이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하자 왕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 결혼 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였다. 그 뒤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 지방을 순수(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니는 것)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 때 금관가야의 왕(김구해)이 와서 법흥왕을 만났으며 532년에 금관가야의 김구해 왕은 세 아들인 노종, 무덕, 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과 함께 신라에 항복함으로 합병되었다. 신라 일통삼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되는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벼슬이 각간(17관등 중 첫 번째인 이벌찬)에 이른다.
금관가야의 항복으로 신라는 낙동강과 남해안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법흥왕은 왕권 강화 정책과 영역 확장 등을 통해 국력이 크게 오르자 536년에 신라 최초의 독자적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였다.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보통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데 신라만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함으로써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드러낸 자주 의식의 표현이라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521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 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승려 원표로 인해 불교가 신라왕실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 초 신라 제19대 눌지마립간(417~458)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로 보고 있다. 신라 제21대 소지마립간(479~500) 때 고구려에서 온 아도는 초기 신라불교의 개척자였다. 그는 묵호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자 3명과 함께 일선군(지금의 경북 선산) 모례(신라 최초의 불교신자)의 집에 숨어 살면서 일반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하였다.

일반 백성들에게 전해진 불교는 신라의 귀족으로부터 배척 받았다.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고민하던 중 528년에 이차돈의 순교하면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은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또는 법운)이라 하였다. 재위 27(540) 만에 죽자 시호(지증마립간 때 처음으로 사용)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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