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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김인문, 대당외교로 신라 일통삼한을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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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김인문의 무덤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이며 특별한 장식이 없다. 무덤 앞의 건물에는 김인문의 업적을 새겼던 비석의 받침돌로 짐작되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있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로 자(字: 주로 남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에 붙이는 일종의 이름)는 인수, 어머니는 문명태후(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인 문희)이다.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의 친동생으로 어려서부터 일찍 학문을 배워서 식견이 넓었으며, 유학을 비롯하여 장자, 노자, 불교와 관련된 모든 책들을 읽었고, 특히 글을 잘 썼는데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비문을 직접 썼다고 한다. 또한 향악(삼국시대부터 궁중에서 전통음악의 한 갈래로 당나라에서 수입된 음악을 당악이라 하였고, 우리의 고유한 전통음악을 향악이라 불렀다)을 잘 했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김인문묘 (金仁問墓) 시도기념물 32호(경주시)

김인문은 신라의 장군이며 외교관으로 태종무열왕, 문무왕 그리고 김유신 장군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진덕여왕 때 왕명으로 당나라에 들어가면서 신라의 외교 문제를 담당하였는데, 그의 평생에 걸쳐 일곱번을 당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는데 날짜로 계산을 하면 22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신라 제32대 효소왕 3년(694) 4월, 66세의 나이로 당나라에서 죽었지만 그의 시신을 신라로 옮겨 다음해 서라벌의 서쪽 벌판(지금의 경주시 서악동)에서 장례를 치렀다.

660년 신라와 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으로 백제를 정벌하게 한다. 이때 김인문은 당나라 군대의 부사령관에 해당하는 "신구도부대총관"으로 소정방과 함께 백제정벌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와 덕물도(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태종무열왕은 태자 법민과 함께 장군 김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웅진구(지금의 금강 하구)에 이르러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쳐들어가 백제를 멸망시켰다. 김인문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파진찬(신라 17관등 중 네번째)과 각간(신라 17관등 중 첫번째로 이벌찬이라고도 함)의 직위를 함께 받는다.

668년 문무왕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북한산성에 이르러 이적의 당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여 한달만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문무왕은 고구려정벌의 공로를 인정하여 김유신에게 태대각간(대각간 위의 특별관등)을, 김인문에게 대각간(신라 17관등 위에 설치한 최고의 관직)의 직위를 내린다. 

경주서악리 귀부((慶州西岳里龜趺) (보물 70호)

김인문의 무덤 옆에 있는데, 그의 업적을 새겨두었던 비석의 받침돌로 짐작하고 있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그리고 신라땅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였다.

670년 3월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가 당나라를 먼저 공격하면서 7년 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때 당나라는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워 신라를 지배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675년 매초성(매소성, 지금의 경기도 양주) 싸움과 676년 기벌포(지금의 금강 하구) 해전의 큰 승리로 신라는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일통삼한을 이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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