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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삼릉, 신라 박씨 왕 세 분이 잠들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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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배동 서남산 자락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으로 아달라 이사금, 신덕왕, 경명왕 등 박씨 왕 세 분의 능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3기의 무덤은 모두 원형봉토분(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무덤 내부는 1953년과 1963년에 신덕왕릉이라 전해져 오는 가운데 무덤이 도굴 당했을 때,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으로 밝혀졌다. 이 무덤 내부의 벽면이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쪽과 서쪽벽 일부에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 등의 다섯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고분벽화가 남아 있지 않은 신라의 무덤으로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학자들 사이에는 다섯가지 색깔을 통해서는 오행설과 연관이 있으며, 색이 칠해진 12개의 벽면은 방위와 관련된 12지신 사상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경주 배동 삼릉 (慶州 拜洞 三陵) (사적 제219호)

 

삼릉 중 첫번째 무덤의 주인공인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재위 154~184)은 일성 이사금의 큰 아들로 왕비는 지마 이사금의 딸인 박씨 내례부인이다. 왕은 키가 7자로 큰 편이며, 콧대가 우뚝한 독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재위 3년(156)에 지금의 충북 충주시 상오면과 경북 문경시 가은읍 사이의 고갯길인 계립령 길을 열었으며, 재위 5년(158)에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이의 길인 죽령을 열었다.
이 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 폭우, 서리, 우박, 지진, 유행병, 가뭄 등의 자연 재해가 많이 일어났다.
재위 12년(165)에는 아찬(신라 17관등 중 여섯번째, 아척간이라고도 함) 길선이 반역을 꾀하다 실패하여 백제로 달아나자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길선을 돌려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백제 제4대 개루왕(재위 128~166)이 거부하면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재위 14년(167)에는 백제 제5대 초고왕(재위 166~214)이 군사를 보내 신라 서쪽 변두리 2개의 성을 습격하여 백성 1,000여명을 사로잡아 갔다. 이에 왕은 일길찬(신라 17관등 중 일곱번째, 일길간이라고도 함) 흥선으로 하여금 2만명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게 하고, 스스로 기병 8천명을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이에 백제는 사로잡아 갔던 신라의 백성들을 모두 돌려 보냈다. 재위 31년 만에 왕이 죽었으나 왕릉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삼릉의 가운데 무덤의 주인공인 신라 제53대 신덕왕(재위 912~917)은 아달라 이사금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신라 17관등 중 다섯번째, 대아간이라고도 함) 예겸이며, 왕비는 헌강왕의 딸이다. 신라의 국력이 기울어 가는 후삼국의 혼란기에 왕위에 올라 후백제의 왕 견훤에게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이 공격 받기도 하였다. 재위 6년(917) 만에 왕이 죽자 시호를 "신덕(神德)"이라하고 죽성(위치 미상)에 장사 지냈다.

세번째 무덤의 주인공인 신라 제54대 경명왕(재위 917~924)은 앞선 신덕왕의 태자로 왕위에 올랐으나, 2년 뒤 일길찬(신라 17관등 중 일곱번째, 일길간이라고도 함) 현승이 반역을 일으키다 사형을 당하고, 920년에는 후백제 왕 견훤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 당하였다. 이때부터 신라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고려 태조 왕건의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으며, 지방의 많은 성들이 고려에 귀순하거나 항복하였다.
재위 8년(924)에 왕이 죽으니 시호를 "경명(景明)"이라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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