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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낭산(신유림), 신라왕실의 성역 경주시 보문동과 구황동, 배반동에 걸쳐 있으며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낭산은 동서의 폭이 좁고,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이다. 이곳은 옛날 신라인들에게 신유림(神遊林)이라 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높이 받들어 우러름을 받았던 곳이다. 신라시대에는 3사(三祠 : 나라에서 지내는 세 가지 큰 제사로 대사, 중사, 소사가 있다) 가운데 대사(大祠)를 받들던 중악으로, 서라벌의 진산(鎭山 :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보호해 주는 산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이었다. 높이 115,102,100m에 달하는 3개의 봉우리를 따라 그 아래 쪽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재(유물, 유적)들이 많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진평왕릉, 선덕왕릉, 그리고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등의 신라왕들의 무덤과 사.. 더보기
일성이사금, 농토를 넓히고 백성들의 사치를 금하다 신라 제7대 일성이사금(재위 134~154)은 유리이사금의 큰아들(갈문왕* 일지의 아들이라고도 함)로 왕비는 지소례왕의 딸인 박씨이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는 무덤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으로 특별한 장식이 없다. 무덤의 밑 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려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다. 무덤 앞의 2단의 축대는 경내를 보호하기 위해 최근에 만든 것이다. 2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북쪽 변방을 침입하는 말갈인들을 막아냈고, 농토를 크게 넓히고 제방을 쌓는 등 농업을 권장하였다. 백성들에게는 금, 은, 보석의 사용을 금지하여 사치를 부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제1 일성이사금 조를 보면 백성을 사랑한 왕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11년(144) 봄, 영을 .. 더보기
창림사지, 신라의 첫 궁궐이 세워지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남산에 있었던 절로 세워진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원나라 조자앙의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서 “창림사비는 신라 김생(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의 글씨로 자획에 전형(典型)이 깊어 당인(唐人)의 명각(明刻)이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 라고 찬양한 글로 미루어 791년(원성왕 7) 이전에 세워진 절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절이 세워져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조선 초에 없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보면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이다)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혁거세거서간과 알영부인)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과 같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가지를 '박'이라 했으므로, 아이의 성을 '박(朴)'이라 했다. 여자아이.. 더보기
양산재, 신라를 건국한 사로육촌의 촌장들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사당으로 1970년에 세운 재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이다. 신라 건국 이전 서라벌 땅에 있었던 여섯 마을(사로육촌) 촌장들의 위패(제사를 받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로 보통 밤나무로 만듬)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여섯 마을의 위치와 시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각 마을의 시조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 1. 알천 양산촌 : 남천 남쪽과 남산 서북쪽 일대에 위치하였다. 촌장은 알평으로 하늘에서 표암봉으로 내려왔는데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2. 돌산 고허촌 : 남천 이북, 서천 이동(일설에는 서천 이서)에 위치한 듯하다. 촌장은 소벌도리이며 하늘에서 형.. 더보기
남간사지, 일념스님이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하는 결사문을 지은 곳 나정, 양산재를 지나 남간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남산기슭의 논 가운데 당간지주가 서 있다. 최근에 논을 없애고 주변을 정리하였다. 남간사는 남간마을에 있었던 절터로 주변에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8각의 대좌와 석정(신라시대의 우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3호) 등이 있고 마을 안 여러 집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초석(목조건물의 기둥으로부터 전달되는 건물의 무게를 받치는 기둥돌)과 축대(집터나 건물터의 땅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권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원종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 순교하다)" 편에 아래와 같이 남간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원화(806~820) 연간에 남간사 중 일념이「염촉의 향분(무덤)에 예불하는 결사문」을 지었는데… 일념 스님이 지은 이 결사문.. 더보기
나정, 신라 천년 역사의 여명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우물터이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린다는 뜻으로, 임금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남을 이르는 말) 전설이 깃든 곳이다.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약 1㎞쯤 떨어진 작은 소나무숲 속에 있는 우물터가 나정(담쟁이덩굴이 우거진 우물이라는 뜻)이다. 2002년부터 2005년 까지 실시한 발굴 조사 결과 신궁으로 여겨지는 8각 건물터와 우물터 및 기와, 토기, 철구류 등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고 발굴 되었다. 이것들을 통해 신화로만 여겨져 왔던 혁거세거서간의 건국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 되었다.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권 제1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 조에 이 우물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하고 있다. 진한 .. 더보기
서남산,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겨진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로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입체적으로 깊게 조각하였는데, 몸체로 내려올수록 얕은 선으로 조각한 특이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수법은 고려시대의 마애불(바위의 벽면에 새긴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조각기법이다. 둥글고 넓적한 얼굴에 반쯤 뜬 눈이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눈·코·입의 표현이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다. 기다란 귀는 어깨에 까지 닿아 있고 목은 짧다. 불상의 몸은 두 어깨를 감싼 통견(스님들이 옷 입는 방법의 하나로 양쪽 어깨를 다 덮는 방법)의 옷차림으로 가슴 밑으로 둥근 U자형으로 깊게 파인 내의가 보이며, 그 밑으로 군의(허리에서부터 아래를 덮은 긴치마 모양의 옷)를 묶은 띠 매듭이 수평으로 새겨졌다. 오른손은 위로 들.. 더보기
서남산, 삼릉계곡 석조여래좌상 얼음골(냉골)이라고 부르는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위에 있는 이 석불좌상은 불상의 높이가 142cm이고 불상이 앉은 대좌의 높이는 96.7cm이다. 불상의 머리 위 정수리에는 큼직한 육계(상투 모양의 머리로 지혜를 뜻함)가 우뚝 솟아 있고 머리칼은 나발(소라껍질처럼 틀어 말린 모양의 머리칼, 곱슬머리)로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풍만하고 둥근 얼굴에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으며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부처님의 목에 있는 3개의 주름으로 지옥, 아귀, 축생을 제도할 수 있는 위력을 상징함)가 가늘게 새겨져 있다. 편단우견(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차림)의 옷주름선은 간결하게 표현되어 풍만한 몸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불상의 손 모습은 항마촉지인(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