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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남간사지, 일념스님이 이차돈의 무덤에 예불하는 결사문을 지은 곳 나정, 양산재를 지나 남간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남산기슭의 논 가운데 당간지주가 서 있다. 최근에 논을 없애고 주변을 정리하였다. 남간사는 남간마을에 있었던 절터로 주변에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8각의 대좌와 석정(신라시대의 우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3호) 등이 있고 마을 안 여러 집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초석(목조건물의 기둥으로부터 전달되는 건물의 무게를 받치는 기둥돌)과 축대(집터나 건물터의 땅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권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원종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 순교하다)" 편에 아래와 같이 남간사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원화(806~820) 연간에 남간사 중 일념이「염촉의 향분(무덤)에 예불하는 결사문」을 지었는데… 일념 스님이 지은 이 결사문.. 더보기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29~신라 제24대 진흥왕과 제25대 진지왕릉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로 7세에 왕위에 올랐다. 집권초기 왕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3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대가야를 병합하고, 한강유역을 점령함으로써 신라가 일통삼한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신라 제25대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지만 재위 4년 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된 비운의 왕이다. 더보기
효현동 3층석탑, 전 애공사지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외와마을 입구에 있는 석탑으로 통일신라 9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통일 후 8세기까지 거대한 크기의 석탑들에 비해 그 규모가 많이 작아졌지만 신라석탑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탑몸돌)을 세웠는데 지붕돌 네 귀퉁이가 버선코와 같이 날렵하게 들려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석탑들은 지붕돌 받침이 보통 5단으로 되어 있는데, 이 탑의 지붕돌 받침은 4단으로 줄어들어 있다. "27년(540) 가을 7월, 왕이 죽으니 시호는 법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삼국사기』신라본기 "가을 8월(576), 왕이 죽으니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삼국사기』신라본기 "신유(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애공사.. 더보기
법흥왕, 일통삼한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다.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에 있는 신라 제23대 법흥왕의 능이라고 전해오는 무덤이다. 경주의 서악이라 불리는 선도산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의 내부구조는 알 수 없는데 겉모양은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삼국시대 신라 왕릉으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무덤의 아래쪽에는 냇돌로 쌓은 둘레돌(무덤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역할)이 드문드문 들어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재위 27년에 죽으니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삼국유사』에서도 왕의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 이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라 말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있는데 애공사지탑(효현리 3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 더보기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 경주시 일대에 널려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무덤)들은 크게 평지에 있는 평지고분들과 주변 산기슭에 있는 산지고분군으로 나눌 수 있다. 평지고분들은 경주 시내의 서남쪽, 즉 반월성의 북쪽에서부터 노서동까지 동서 약 1Km, 남북 약 1.5Km 안에 널려 있는 고분들로서, 모여 있는 지역에 따라 교동고분군, 인왕동고분군, 황남동고분군, 황오동고분군, 노동동고분군, 노서동고분군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황남동고분군 가운데 위치해 있는 미추왕릉을 중심으로 20여 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는 지역은 1973년 ‘대릉원’이라는 고분공원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포함되어 있다. 이 고분들에 대한 학술적인 조사는 1906년부터 시작되어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그 수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