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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포석정, 신라 천년 역사의 낙조(落照)를 지켜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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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배동 남산기슭에 있는 석조유물로 통일신라시대의 연회장소 또는 이궁(왕이 거둥할 때 머무러는 별궁 또는 행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물길의 형태가 전복 껍질과 같다고 하여 "전복 포(鮑)"자를 써서 포석정이라 부른다.

일연스님이 지은『삼국유사』에 포석정에 관한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권2 "처용랑망해사" 편을 보면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이 포석정에 거둥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주위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왕 혼자만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권5 효선 편을 보면 "효종랑(신라말기의 화랑으로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버지)이 남산 포석정에서 놀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포석정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신라 왕들과 화랑들의 연희 장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포석정 입구
경주포석정지(慶州鮑石亭址) (사적 1호)

이 곳은 특히 신라 제55대 경애왕(924~927)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함으로 신라 천년 역사가 막을 내렸지만, 신라는 이미 후백제의 견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애왕 때 그 기나긴 역사를 마감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의 최후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을 9월(924), 견훤이 고울부(지금의 영천)에서 우리 군사를 침범하므로 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태조(왕건)는 장수에게 강병 1만 명을 내주어 가서 구원케 하였다. 겨울 11월, 견훤은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서 엄습하여 서울에 당도하였다. 왕은 비빈, 종척들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잔치하고 놀다가 부지불각 중에 적병이 들이닥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중락)…왕은 비첩 수명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군중으로 잡혀왔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케 하고…(하략)…

이처럼 포석정은 신라 천년의 역사가 막을 내린 비운의 현장으로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포석정에 대하여 신라왕들과 화랑들의 잔치 장소가 아니라 국가적인 행사나 제사가 행해지던 장소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당시 후백제 견훤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 상황에 빠져 있었고, 경애왕이 포석정으로 행차했던 시기가 음력 11월 한 겨울인 점을 감안할 때, 잔치를 벌이며 놀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당시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청한 구원군이 오지 않는 위급한 상황에서 조상들을 찾아가 나라를 지키고 박씨 왕들의 지위를 유지시켜 달라며 재를 올렸을 것이라는 견해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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