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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이사금

신라의 신분제도, 성골과 진골 그리고 육두품 신라시대에는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분을 엄격히 구분하였는데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귀족과 일반백성을 두품제로 구분하였는데 이것을 골품제도라고 한다. 신라는 골품제도를 통해 벼슬, 결혼, 옷차림, 집의 크기, 수레 등의 규모와 장식 등 사회생활 전체에 걸쳐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신라의 국가 형성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골품제도는 6세기 초에 법으로 정해진 후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멸망에 이를 때까지 이 제도를 엄격하게 지켰다. 신라시대 골품제도에서 최고의 신분 계급은 성골과 진골이다. 특히 성골은 그 중 가장 높은 신분으로 왕족 중에서도 일부만 차지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부터 제28대 진덕여왕까지 왕들을 성골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제23대 법흥왕에서 진덕여왕에.. 더보기
오릉, 신라초기 박씨 왕들이 묻혀 있는 곳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능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모두 5기가 있으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 제2대 남해차차웅(재위 4~24), 제3대 유리이사금(재위 24~57), 제5대 파사이사금(재위 80~112)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오릉이 혁거세거서간의 단독 무덤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칠일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비도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이 한 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두 팔과 두 다리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제각각 장사 지내 오릉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