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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波息笛

국립경주박물관 을미년 맞이 특집진열 : “아름답고(美) 착한(善) 동물, 양(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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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을미년을 맞이하여 특집진열 ‘아름답고(美) 착한(善) 동물, 양(羊)’을 신라미술관 1층에서 2월 17일(화)부터 5월 3일(일)까지 개최합니다. 


○ 기간: 2015. 2. 17.(화) ~ 5. 3.(일) (76일간)

○ 장소: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1층





1) 전시를 개최하며

2015년은 을미년(乙未年) 양(羊)띠 해입니다. 양은 십이지(十二支) 가운데 여덟 번째 동물로서 남남서쪽을 가리키며 오후 1시~3시에 해당합니다. 양은 온순한 성질로 인해 예로부터 평화와 순종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희생양(犧牲羊)이란 말도 종교 의식에 바치는 제물(祭物)로 양을 선호했던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美(미: 아름다움), 善(선: 착함), 義(의: 올바름), 祥(상: 상서로움) 처럼 羊(양)이 들어간 한자에는 좋은 뜻을 지닌 것이 많습니다. 양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양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중국 동한(東漢: 25~219년) 초, 유조(劉照)가 쓴『석명(釋名)』이란 책에 삼한(三韓)에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양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또한『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599년에 백제가 다른 동물들과 함께 양 두 마리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에서 양 기르기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 양들이 어떤 종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년) 때인 820년에 고양(羖羊: 염소로 추정) 두 마리, 백양(白羊) 네 마리, 산양(山羊) 한 마리 등을 일본에 보냈다는『일본후기(日本後紀)』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에 여러 종류의 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918~1392년) 정종(재위 945~949년) 때는 개경 근처에서 왕실의 식용으로 양을 길렀다고 합니다. 1116년(예종 11년)에는 요(遼: 916~1125년)나라의 유민이 양 수 백 마리를 갖고 투항하였고, 1169년(의종 23년)에는 금(金: 1115~1234년)나라에서 양 2천 마리를 보내온 것으로 보아, 당시 북방 민족과의 교류로 양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1392~1897년)에는 양장(羊場)을 두어 양을 길렀으며, 제물로 썼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양을 대규모로 사육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기와 젖, 그리고 가죽과 털 등을 주는 헌신적 동물인 양을 사람들은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양을 어떻게 형상화하였을까요? 양의 해를 맞이하여 옛사람들이 만든 양들을 살펴보며 양의 미덕(美德)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청동제초두-황남대총 북분, 천마총(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납석제 십이지상(양), 청동제 십이지추(사진 : 국립경주박물관)

전시품은 위 사진 4점 외 나머지 4점을 포함하여 총 8점이 전시되어 있다.




2) 우리나라의 토종 양은 어떤 종류일까?

오늘날 양이라고 하면 우리는 곱슬거리고 부드러운 털이 몸에 가득 난 초원의 면양(綿羊: sheep)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면양은 근대 이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양의 한 종류입니다. 우리나라의 토종 양은 면양보다는 산양(山羊: goral)에 가까웠다고 추정됩니다. 본래 양(羊)이란 한자도 면양과 함께 산양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었습니다. 

산양은 털이 곧게 자라며, 암수 모두 턱수염과 머리뿔을 지닌 것이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산양의 생김새는 수염(鬚髥) 달린 소[牛]를 뜻하는 염소(goat)와 비슷합니다. 염소는 산양을 가축화한 동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십이지의 미(未)에 해당하는 동물은 면양이 아니라, 염소와 닮은 산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료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http://gyeongju.museum.go.kr/)-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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