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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미탄사지 3층석탑 미탄사지 삼층석탑(味呑寺址三層石塔)비지정문화재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 남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탑 앞쪽에는 석등 석재가 일부 남아 있다.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미탄사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지금도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남아 있는데 여기가 바로 최후(최치원)의 옛집이 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현재 이곳을 미탄사로 추정하고 있다. 1980년 경주시에서 국립경주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여 30일간 조사 후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3층석탑 앞에 남아있는 석등 조각물의 일부 최근에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시행한 "2014년도 중요 폐사지 시발굴조사 사업"을 통해 미탄(味呑)이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를 발굴하였다. 더보기
원원사지 동·서 3층석탑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원원사지(사적 제46호)에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이다. 원원사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권제5 신주 제6 명랑신인조에 그 내용이 전해져 오고 있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源寺)가 있는데, 세상에 이런 말이 전한다. "안혜 등의 네 대덕(안혜, 낭융, 광학, 대연)이 김유신(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장군), 김의원(신라 중대의 귀족), 김술종(신라의 진골출신으로 진덕여왕 때 삭주도독을 지냄,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화랑 죽지랑의 아버지)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절이다. 네 대덕의 유골은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혀 있기 때문에 이름을 사령산 조사암이라고 한다." .. 더보기
숭복사지 동·서 3층석탑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토함산 자락에 있는 절터이다. 숭복사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두탑이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가람 형식이다. 양탑 모두 2층의 기단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석탑으로 동탑은 2층 몸돌이 없어지고, 서탑은 2층과 3층 몸돌 및 3층 지붕돌이 없어졌다. 두 탑 모두 2층 기단면에 한쪽에 2구씩 전체 8구의 팔부신중(부처님의 법을 지키고 대중을 교화하는 하늘의 장수로 팔부중 또는 천룡팔부라고도 함)이 조각되어 있다. 숭복사지삼층석탑 (崇福寺址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4호) 특이한 점은 탑의 지붕돌 네 모서리 끝에 풍경(법당이나 불탑의 처마 또는 지붕 끝 부분에 매달아 소리를 나게 하는 작은 종)을 달았던 흔적인 구멍들이 남아있다. 지붕돌 모서리.. 더보기
감산사지 3층석탑 감산사지삼층석탑(甘山寺址三層石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의 감산사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이다. 2층의 기단 위에 세워진 탑 몸돌 가운데 2~3층은 없어졌다. 각 층의 지붕돌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감산사에 모셔져 있다가 1915년 서울로 옮겨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의 광배(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것)에 새겨진 글귀에 따르면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2~737) 18년(719) 2월 당시 중아찬(신라17관등 중 여섯번째) 김지성이 감산에 있는 자신의 토지를 내놓아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그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던 사찰이 감산사이다. 더보기
창림사지 3층석탑 창림사지 3층석탑(보물 제1867호) 상층 기단석에 팔부신중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 볼 수 있는 팔부신중은 남쪽면에 아수라(阿修羅), 북쪽면에 가루라(迦樓羅), 서쪽면에 천(天), 건달바(乾달婆)등 네 개의 조각상이 남아 있다. 1층 탑신석에는 네 면에 문 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2015년에 국가지정 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받았다.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최초의 궁궐이 있던 곳이라고 기록해 놓았다.남쪽 기단석에 조각된 아수라상북쪽 기단석에 조각된 가루라상서쪽 기단석과 조각된 천과 건달바상 더보기
서악동 3층석탑, 인왕상이 조각된 모전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모전석탑이다. 일반적으로 돌을 다듬어 쌓은 탑을 석탑이라 부르고 구운 전돌(벽돌)을 사용하여 쌓은 탑을 전탑, 나무를 이용하여 세운 탑을 목탑이라고 부른다.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는 3국 가운데, 중국을 전탑의 나라,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 부르고 한국을 석탑의 나라로 부른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목탑과 전탑이 있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탑들의 대부분이 석탑들이다. 벽돌로 쌓은 전탑을 모방한 석탑을 보통 모전석탑이라고 부르는데 현재 경주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은 서악동3층석탑과 경주 남산동 동3층석탑(보물 124호)을 비롯하여 근래에 복원된 경주 서남산 용장계 지곡 제3사지 3층석탑 등 3기가 있다.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慶州 西岳洞 三層石塔) (보물 65호) 1층 탑.. 더보기
효현리3층석탑, 전 애공사지 경주효현리삼층석탑(慶州孝峴里三層石塔) 보물 67호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외와마을 입구에 있는 석탑으로 통일신라 9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통일 후 8세기까지 거대한 크기의 석탑들에 비해 그 규모가 많이 작아졌지만 신라석탑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탑몸돌)을 세웠는데 지붕돌 네 귀퉁이가 버선코와 같이 날렵하게 들려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석탑들은 지붕돌 받침이 보통 5단으로 되어 있는데, 이 탑의 지붕돌 받침은 4단으로 줄어들어 있다. "27년(540) 가을 7월, 왕이 죽으니 시호는 법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삼국사기』신라본기 "가을 8월(576), 왕이 죽으니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삼국사기』신라본기.. 더보기
황복사, 신라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던 곳 경주구황리3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국보 37호 황복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낭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터로 3층 석탑과 2기의 귀부(비석을 세워 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가 남아있고 금당터로 여겨지는 곳에 12지신상(열 두해 띠를 상징하는 동물신상)조각이 묻혀 있다. 임금 왕(王)이 세겨진 황복사지 귀부 절을 세운 사람과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의상(625~702)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절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신라 제27대 선덕여왕(632~647) 이전에 이미 절이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황복(皇福)”이라는 절 이름을 통해 신라왕실의 복을 빌던 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43년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2층 몸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더보기
창림사지, 신라의 첫 궁궐이 세워지다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남산에 있었던 절로 세워진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원나라 조자앙의 『동서당집고첩발(東書堂集古帖跋)』에서 “창림사비는 신라 김생(통일신라시대의 서예가)의 글씨로 자획에 전형(典型)이 깊어 당인(唐人)의 명각(明刻)이라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 라고 찬양한 글로 미루어 791년(원성왕 7) 이전에 세워진 절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절이 세워져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다 조선 초에 없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보면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이다)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혁거세거서간과 알영부인)를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알이 박과 같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가지를 '박'이라 했으므로, 아이의 성을 '박(朴)'이라 했다. 여자아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