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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경주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34~경주 재매정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의 옛 집터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조선 고종 9년(1872) 경주부윤 이만운이 김유신의 거처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김유신유허비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전성기에 화려한 대저택으로 알려진 35채의 금입택 중 하나인 재매정댁에 있던 우물이 비각 옆에 지금도 남아있다. 더보기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33~경주 삼랑사지 당간지주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랑사는 신라 제26대 진평왕 19년(597)에 건립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제31대 신문왕에 의해 국사가 된 경흥스님이 문수보살을 만난 이야기가 삼랑사를 배경으로 실려 있다. 더보기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32~경주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36호, 신라시대 석불 중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불상의 수인(손모양)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광배 안쪽에는 작은 불상과 보상화 덩쿨무늬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광배 뒷면에는 인간을 모든 질병으로 부터 구한다는 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다. 더보기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31~경주 나원리 5층석탑 이 석탑은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이끼가 끼지 않고 순백색을 잘 유지하고 있어 경주 삼기팔괴 중 하나인 "나원백탑"이라고 불리고 있다. 경주에는 오래전에 세가지 진기한 보물과 여덟가지 기이한 풍경이 있는데, 이것을 아울러 "경주 삼기팔괴"라 불리워지고 있다. 더보기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30~경주 쌍상총 경주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사적 제39호로 지정된 노서동고분군에 속한 무덤이다. 1953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 발굴단에 의해 조사되었지만 그 당시 이미 도굴을 당해 무덤 부장품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무덤 내부형태는 굴식돌방무덤으로 2개의 주검받침대가 발견되어 쌍상총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노서동고분군 대로 앞엔 요즘 핫플레이스가 된 황남동 황리단길이 위치해 있다. 더보기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29~신라 제24대 진흥왕과 제25대 진지왕릉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로 7세에 왕위에 올랐다. 집권초기 왕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3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대가야를 병합하고, 한강유역을 점령함으로써 신라가 일통삼한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신라 제25대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지만 재위 4년 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된 비운의 왕이다. 더보기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28~신라 제7대 일성이사금 일성이사금은 유리이사금(신라 제3대 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박씨로 지소례왕의 딸이다. 권 제1 신라본기 제1 5년(138년) 봄 2월, 금성(신라의 첫 궁궐)에 정사당(국가 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 알천(지금의 북천) 서쪽에서 열병식을 크게 거행 하였다. 6년(139년)에는 말갈의 침입이 있었고, 7년(140년)에는 말갈의 침입을 방비하였다. 11년(144) 봄 2월, 영을 내려 "농사는 정치의 근본이요 밥먹기는 오로지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니 여러 주군에 제방을 수리하고 농토를 널리 개척하라"하였고 또 "민간에서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권 제1 신라본기 제1 일성왕 때 말갈이 침입이 있었고, 압독국(지금의 경북 경산에 위치한 소국)의 반란이 있.. 더보기
천년 세월 속을 거닐다 027~경주 창림사지 삼층석탑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에 궁실을 세우고 이들 두 성스러운 어린이를 모셔다가 길렀다. 남자아이(박혁거세)는 알에서 나왔고 알이 모양이 마치 박과 같아서, 성을 박(朴)이라 하고, 여자아이(알영부인)는 그가 나온 우물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아이가 자라 13세가 되자 오봉(중국 한나라 선제의 연호) 원년 갑자(기원전 57년)에 남자아이는 왕이 되어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이라 하고, 혹은 사라, 사로라고도 했다. 제1권,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