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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경주의 신라시대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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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일대에 널려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무덤)들은 크게 평지에 있는 평지고분들과 주변 산기슭에 있는 산지고분군으로 나눌 수 있다.

평지고분들은 경주 시내의 서남쪽, 즉 반월성의 북쪽에서부터 노서동까지 동서 약 1Km, 남북 약 1.5Km 안에 널려 있는 고분들로서, 모여 있는 지역에 따라 교동고분군, 인왕동고분군, 황남동고분군, 황오동고분군, 노동동고분군, 노서동고분군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황남동고분군 가운데 위치해 있는 미추왕릉을 중심으로 20여 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는 지역은 1973대릉원이라는 고분공원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포함되어 있다. 이 고분들에 대한 학술적인 조사는 1906년부터 시작되어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그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약 300기가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교동고분군-뒷쪽 숲이 경주 계림

평지고분의 대부분은 삼국시대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신라의 대표적인 고분 형식)으로 덧널(시체를 모신 관을 담는 상자) 위를 사람 머리 크기의 냇돌로 돌무지를 쌓고 흙으로 둥글게 씌워 올린 무덤이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꾸미개, 말갖춤, 무기, 그릇 등 각종 유물이 많이 출토된다. 특히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 왕릉급의 대형고분에서는 금관, 금제허리띠를 비롯한 금제꾸미개와 안장틀 등 금동판으로 장식된 각종 말갖춤, 금판이나 금동판으로 장식한 긴 칼, 금.은.금동.청동제의 각종 그릇과 유리그릇, 옷칠그릇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천마총(제155호 고분)-대릉원 내
황남대총(제98호 고분)-대릉원 내

이와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초까지 왕족을 비롯한 신라의 중앙 지배귀족들이 사용한 무덤 양식이었으며, 이때는 신라 역사에서 김씨 왕이 세워지고, 그 왕들이 마립간으로 불렸던 시기로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 김씨 왕조 마립간 시기의 무덤 형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산지고분들은 경주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에서 뻗어 내린 산기슭에 널려있는 고분들로 지역에 따라 보문동고분군, 동천동고분군, 충효동고분군, 서악동고분군 등으로 나누어진다. 산지고분도 겉모양으로는 대부분 흙으로 둥글게 쌓아올린 무덤으로 그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수백 기로 보고 있다.

서악동 고분(사적 142호)

내부 구조가 알려진 산지고분은 대부분 굴식 돌방무덤으로, 경주의 신라고분은 먼저 평지에 돌무지덧널무덤이 만들어지다가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면서 고분의 위치도 평지에서 산기슭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고 있다.

산지고분의 굴식 돌방무덤들은 납작천장에 평면 직사각형 돌방 형식도 일부 발견되고 있으나, 대부분은 둥근천장의 평면 사각형 돌방 형식이다.

총효동 공개석실분(통일신라시대 돌방무덤)

널길(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체를 안치한 방에까지 이르는 길)은 돌방 남벽의 가운데에 달린 것, 서쪽에 달린 것, 동쪽에 달린 것이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세 가지가 함께 만들어졌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널길이 가운데에 달린 것이 많아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주고분들 가운데 굴식 돌방무덤은 삼국시대 후기인 6세기 초부터 통일신라 말까지 만들어 졌는데,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고 율령이 반포되는 등 사회적 큰 변화가 이루어졌던 신라 제23대 법흥왕(514~540) 때부터 무덤형식이 새롭게 바뀌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산지고분의 굴식 돌방무덤에서는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불교의 영향으로 장례가 간소화된 데다가 돌무지덧널무덤과는 달리 출입구가 있어 쉽게 들어가고 나올 수 있어 거의 모두 도굴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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