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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능지탑, 문무대왕의 화장터(火葬址) 고문의 바깥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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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 서쪽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건축물로 능지탑 또는 연화탑으로 불리어 왔다. 아래 쪽 기단 4면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 중 남쪽면의 뱀, 동쪽 면의 호랑이, 용이 새겨진 조각은 없어지고 현재는 9구의 조각상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내가 죽은 후 열흘 안에 고문 바깥뜰에서 인도식으로 불로 화장하라고 유언을 하였는데, 능지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었고, 1975년 해체, 발굴조사 때 주변 지층이 까맣게 거슬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짐작하고 있다.

경주능지탑지 (慶州陵只塔址) 시도기념물 34호(경주시)

능지탑 원숭이상(12지신상)

문무왕의 유조(임금의 유언), 『삼국사기』권 제7 신라본기 제7

21년 가을 71일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모든 신하들이 왕의 유언에 따라서 동해(東海) 어귀의 큰 돌 위에 장사하였다.(세속의 전설에는 왕이 변하여 용이 되었다하여 그 돌을 대왕석이라 불렀다).

부덕한 몸이 어지러운 운을 만나고 전쟁의 때를 당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무리를 죄주고 협조하는 무리를 불러들여 멀고 가까운 곳을 모두 편안케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안심시켰고 아래로는 부자의 오랜 원수를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상을 두루 주었고 벼슬을 터서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에게 균등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으며 백성을 어질고 장수하는 땅으로 만들었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들어주니 집집이 넉넉하고 백성들이 풍요하여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근심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곡식이 산언덕처럼 쌓여 있고 감옥은 풀이 무성하게 되니, 신과 인간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고 관리와 백성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온갖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 더욱 심한 병이 되었다. 목숨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홀연히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태자(신문왕)는 일찍이 밝은 덕을 오래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에서 아래로는 뭇 관원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 있는 이 섬기는 예의를 빠뜨리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 되니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또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로 바뀌어 옮아가니, 오나라 왕의 북산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 모양의 빛나는 향로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나라 임금(조조)이 묻힌 서릉의 망루는 단지 동작이라는 이름만 전할 뿐이다. 지난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헛되이 재물을 쓰는 것은 서책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된다. 가만히 생각하면 슬프고 애통함이 끝이 없을 것이나, 이와 같은 일은 즐거이 행할 바가 아니다.

죽고 나서 열흘이 지나면 곧 궁궐의 문 바깥뜰에서 서국(인도)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을 입는 등급은 정해진 규정이 있거니와 장례를 치르는 제도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는데 힘쓰라. 변경의 성과 진을 지키는 일과 주와 현의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격식(형벌과 행정에 관한 법)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도록 할 것이며 주관하는 이는 즉시 시행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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