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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경주남산, 부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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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옛 수도였던 경주시의 남쪽을 둘러싸고 경주평야의 남북으로 솟아 오른 불교문화유적이 많기로 유명한 산이다. 경주평야의 주위에는 서쪽에 선도산, 동쪽에 낭산과 명활산, 북쪽에 금강산 등 많은 산들이 성벽처럼 둘러서 있는데 그 중에 남쪽으로 높게 솟은 산이 남산이다.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아울러 남산이라고 한다. 제일 높은 봉우리인 금오봉의 높이는 468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 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서남산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동남산과 서남산에는 각각 16개의 계곡이 있고, 남쪽의 2개와 합하여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유적의 숫자로 보면 서남산 쪽이 동남산보다 월등히 많은데, 이 계곡들에는 석탑·마애불·석불·절터 등이 널려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절터는 112곳이며, 탑은 61기이고, 불상은 80여체를 헤아린다.

서남산에서 바라본 경주 시가지 전경

61기를 헤아리는 석탑 중에는 높이가 7m 가량 되는 큰 것, 5~6m 되는 것, 3~4m 정도의 작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중간 것이 제일 많다. 평지에 세워진 절은 보통 법당 앞에 탑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남산에 세워졌던 절의 탑들은 법당의 위치와 상관없이 대개 보기 좋은 바위 봉우리 위에 세워졌다.

남산의 불상들을 살펴보면 입체로 된 것이 29체이고 바위 면에 새긴 마애불상이 51체이다. 큰 것은 10가량 되는 것도 있지만 보통 4~5m 되는 것이 많다. 또 작은 것은 1m 정도 되는 것도 있다. 부처골 감실여래좌상이나 배리삼존불, 장창골삼존불처럼 6세기말~7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도 있고, 삼국의 통일을 기원하여 조성한 탑골부처바위도 있으며, 통일된 나라의 영광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칠불암불상군도 있다.

그리고 왕정골 여래입상이나 삿갓골 여래입상처럼 우리 민족예술의 황금시대인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도 있다. 또 보리사 여래좌상처럼 화려하고 섬세하던 8세기말 내지 9세기 초반의 것도 있고, 9세기 중엽의 것들도 있어 수백 년 이어온 신라 불교미술의 흐름을 이곳에서 모두 볼 수 있다.

남산에 마애불상이 많은 것은 우리 조상들이 불교수입 이전부터 믿어온 바위신앙이 불교신앙과 합쳐진 우리 불교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바위 속에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믿어온 신라 사람들은 불교가 들어온 뒤 바위 속에 부처가 있다고 믿게 되어 많은 마애불상을 만들었다. 냉골 마애대좌불은 머리는 입체에 가까운 조각인데 비해 몸체는 바위 위에 선각으로 되어 있다. 몸체가 반 자연·반 인공으로 되어 불상이 바위 면에서 튀어나오지 않고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위 속으로 이끌어 부처의 영에 예배하도록 되어 있다. 냉골 석가여래삼존상이나 아미타여래삼존상(보통 선각육존불이라고 함)은 다듬지 않은 바위 면에 새겨놓았다.

서남산 냉골 마애대좌불
서남산 냉골 선각육존불

남산에는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때 쌓은 남산신성이나 고허성 같은 국방시설의 터도 남아 있다. 남산신성 터 안에는 2곳의 무기 창고터와 1곳의 식량 창고터가 남아 있는데 식량 창고터의 길이는 100m이며, 지금도 비가 오면 탄화된 쌀알들이 발견된다. 무기창고도 길이 50m가 넘는 큰 건물이었는데 모두 밑으로 바람이 통하는 다락식 건물이었다.

또한 남산은 신라 사영지(청송산, 피전, 금강산) 가운데 한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이곳에서 모임(화백회의)을 갖고 나랏일을 의논하면 반드시 성공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첫 왕인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남산 기슭의 나정이며, 불교가 공인된 528(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님이 항상 계시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높이 받들어져 왔다.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나라가 멸망할 것을 미리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삼국유사』전해져 온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어느 날,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좌우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왕만이 홀로 이것을 보았다. 왕은 스스로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형상을 보였던 것이다.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했던 것이나,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가 나타났다고 하여 방탕한 생활이 더욱 심해졌던 까닭에 신라는 마침내 신라 55대 왕인 경애왕이 이곳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치욕을 당하고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바치면서 멸망하였다고 한다. 경주 남산은 신라 천년 역사의 시작을 함께하였으며, 신라의 마지막을 말없이 지켜본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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