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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진지왕, 영웅의 아들 왕위에서 폐위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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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몇 개만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
현재 학자들 중 일부는 진지왕의 무덤이 이곳이 아니라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4기의 무덤 가운데 아래쪽에서 두번째 무덤을 진지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일찍 죽은 동륜태자의 동생이다. 이름은 사륜 또는 금륜이며 어머니는 사도부인(성은 박씨. 모량리 각간 영실의 딸)이며 비는 지도부인(성은 박씨, 기오공의 딸)이다.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이 일찍 죽었고 그 아들인 백정(신라 제26대 진평왕)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진흥왕의 뒤를 이어 둘째로서 왕이 되었다.

신라진지왕릉(新羅眞智王陵)  (사적 178호)

서악리고분군(사적 142호)
선도산에서 바라 본 서악리고분군(사적 142호)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후 바로 이찬(신라 17관등 중 두번째) 거칠부를 상대등(신라 최고의 관직으로 법흥왕 때 처음 설치됨)으로 삼고 나라의 일을 맡겼다. 577년 겨울 10월에 백제가 신라의 서쪽 국경을 침범하자 이찬 세종을 보내어 일선군(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북쪽에서 백제군을 물리치고 내리서성을 쌓아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578년에 중국 남조의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유지하였고, 백제의 알야산성(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을 공격하였다.
579년에 백제는 웅현성(지금의 충정북도 보은군으로 추정)과 송술성을 쌓아 2년 전에 신라에서 쌓은 내리서성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진흥왕 때 백제 제26대 성왕(재위 523~554)의 전사로 인해 나제동맹이 깨지면서 백제는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하게 된다. 진지왕 때부터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까지 백제의 적극적인 공격으로 인해 신라는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진지왕은 재위 4년 째인 579년 가을 7월 17일에 죽으니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의 짧은 재위기간 중 특별한 일이 없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나라를 다스린 4년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진지왕이 음란한 짓에만 빠져 있으서 나라 사람들이 그를 내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통삼한 이전 신라의 최전성기를 연 위대한 영웅 진흥왕의 아들이었지만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진지왕이 쫓겨나게 되는 이유가 되는 특이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량부에 사는 절세미인인 도화랑(도화녀)을 사모하여 궁중에 불려 들이려고 하였으나 도화녀는 남편이 아직 살아있다며 왕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진지왕은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고 하였는데 도화랑이 "그러면 괜찮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왕위에서 쫓겨나 죽은지 2년 후 도화랑의 남편이 죽자 열흘 뒤 진지왕이 한밤중에 영혼으로 찾아와 도화녀와 사랑을 나누고 비형랑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진지왕의 아들은 용수(또는 용춘)이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이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고, 폐위되어 쫓겨났지만 신라 일통삼한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태종 무열왕계의 시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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