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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나정비명, 신라 시조왕 탄강정허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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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 탄강정허비명(誕降井墟碑銘)-나정비명(蘿井碑銘)

신라(新羅)의 나라 됨이 무릇 삼성(三姓)이니, 박씨(朴氏)의 건국은 한()나라 때로서 그 후에 석씨(昔氏)와 김씨(金氏)가 서로 이었는데 석씨는 전쟁을 자주하여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김씨는 38세를 전하여 경순왕 때에 고려에 나라를 양도하여 삼한이 통일되었다. 석씨는 무력으로 나라를 지켜왔고 김씨는 겸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전하였으니,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하나 동국(東國) 사람들이 박씨를 더욱 사모하게 되는 것은 그 건국한 공로가 심히 커서 인의(仁義)의 덕이 마음속에 깊이 배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지금은 경주부(慶州府)에 부속되었다. 부남(府南, 경주부 남쪽) 7리 되는 곳에 우물이 있으니, 세상에서 말하기를 시조왕께서 이곳에서 탄강(誕降, 하늘에서 세상에 내린다. 즉 임금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남을 이르는 말)하셨다한다. 왕의 성은 박씨요. (, 높은 사람의 이름)는 혁거세(赫居世)니 한나라 지절 원년(서기전 69)에 탄생하시어 13세에 이미 의젓한 대인(大人)으로서 육부 촌장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시고 나라 이름을 서라(徐羅)라 하였다. 처음에 고조선의 백성들이 동해가에 나누어 살아 6촌을 형성하였으나 임금이 없었는데 고허촌장이 우물 위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기에 가서보니, 박과 같은 큰 알이 있기에 깨어보니, 어린아이가 나오므로 동천(東川)에 목욕시키니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몸에서 광채가 나서 거두어 기른 후 이에 추대하여 임금을 삼은 것이다. 박으로 성을 삼으니 우리말에 박을 박()이라 하므로 이렇게 일컬은 것이다. 5년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맞으니, 비께서 덕이 높으셨다. 8년에 왜인이 쳐들어 왔다가 왕과 비가 덕이 높다는 말을 듣고 물러갔으며, 17년에 왕께서 비와 함께 육부를 순시(巡視, 돌아다니며 사정을 보살핌)하여 농잠(農蠶, 농사짓기와 누에치기)을 장려하셨고 19년에 변한이 와서 항복하고 21년에 왕성을 이룩하시고 30년에 낙랑인이 침입하여 약탈하려 하다가 백성들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음을 보고 말하기를 도의를 지키는 나라이니 침범할 수 없다하고 회군하였고, 39년에 마한왕이 죽으매 가까이 모시는 신하가 왕께 말씀 올리기를 마한이 지난번에 우리 사신을 욕되게 했으니, 마땅히 초상을 틈타서 쳐들어감이 옳을 것입니다하니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나는 하지 않겠다하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弔問, 남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어 위로함)하였다. 53년에 옥저(沃沮, 우리나라의 고대 국가 가운데 함경도 함흥 일대에 있었던 나라)가 좋은 말 20필을 헌납하였다. 이때에 삼한이 모두 전쟁을 숭상했으나 왕은 홀로 인의를 행하여 위력을 힘쓰지 않으니, 여러 나라들이 이 소문을 듣고 붙기를 원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 왕께서 왕위에 계신지 61년에 훙서(薨逝, 임금이나 왕족 등의 죽음을 이르는 말)하니, (, 나이)73세이며 박씨가 왕통을 이은 분이 10세에 이르렀는데, 이로부터 석씨와 김씨가 번갈아 왕위를 전하게 되고 또 서라(徐羅)를 고쳐 신라(新羅)로 하였으니, 이것이 왕께서 덕을 닦아 나라를 세운 대략이다.

 

 

신라가 삼성(, , )이 서로 전하여 992년을 향국(享國, 나라를 이어오다)하였는데 사필(史筆, 역사를 기록하는 방법)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정치의 흥()하고 쇠()한 자취를 알 수 없으나 시조왕께서 삼한의 가장 처음 나신 군주로서 인의로 나라를 세워 백성이 하나 같이 잘 따르게 되었으니, 하늘이 이런 분을 탄강하시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석씨의 강함과 김씨의 순함이 모두 왕의 덕에 근본하여 오래도록 나라를 유지함이 후세에 비길데가 없도다. 지금 서울의 큰 집안으로 일컫는 집안에 박씨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김씨도 공경대부(公卿大夫, 벼슬이 높은 사람들)를 배출했으나 홀로 석씨의 자손을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혹은 박씨와 김씨의 유덕(諭德, 죽은 이가 후세에 끼친 덕)이 가장 두터워서 그런 것인가? 혹은 하늘의 보복하는 이치가 다른 까닭인가? 본조(本朝, 현존하는 왕조, 즉 조선)에서는 세종 때에 비로소 봉향(奉享, 받들어 모시다)하는 예식(禮式, 예법에 따라 치르는 의식)을 베풀어서 경주의 남쪽에 사당을 세워 제사하시고 영조 27년에 태학사(太學士, 조선시대 책이나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임금에게 의견을 올리던 홍문관의 으뜸벼슬) 조관빈에게 명하여 묘비문을 짓게 하시니, 대개 주()나라의 삼각(三恪)의 의를 본뜬 것이다. 금상 2년에 공철(公轍, 나정비명을 쓴 사람)관찰사(觀察使, 지금의 도지사)로 영남에 오매 박씨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우물의 유래가 오래고 아는 사람이 죽어지면 실전(失傳, 묘지나 고적 따위에 관련되어 전하여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됨)하기 쉽다하여 사적을 기록한 글을 청하니, 이 우물은 전설로 전해온 것이니, 그곳에 나아가서 옛 일을 생각하면 시조왕 유적과 공덕의 근본한 바이니, 그 후손된 사람이 어찌 황폐하게 하겠느냐. 명하기를 신라의 나라됨이 박씨로 성하셨네. 석씨는 용감했고 김씨는 공손하여 길이 천명을 이으시다. 왕께서 신성하시고 알영께서 왕비되니, 탄생하신 그때부터 하늘이 주신 바이며 백성이 복종한 바이다. 말이 우물가에 보이더니, 박만한 큰 알에서 아기가 태어나매 울음소리 우렁차다. 간적(簡狄,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인 제곡의 왕비로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설을 남음)(, 중국 고대 전설상의 왕)를 낳고 강원(姜嫄,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인 제곡의 왕비로 거인의 발자취를 밟고 기를 낳음)(, 중국 주나라를 세운 사람)를 낳음과 같다. 상제(上帝, 하늘의 신, 즉 하느님)께서 처음 나신 임금님을 사랑하사 동국(東國,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 땅을 차지하시니, 진한과 변한과 낙랑과 왜국이 옥과 비단을 조공을 바쳐 문()을 닦고 무()를 거두었도다. 이 서라(徐羅) 나라를 삼성이 서로 전함에 박씨가 더욱 번성함은 덕이 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저 깊숙한 우물가에 높은 비() 세워지니, 감사(監司)가 글을 짓고 부윤(府尹)이 글을 써서 모든 사람 함께 일하여 바람과 비는 순하고 화하여 이 고장에 실수(失壽, 목숨을 잃어버림)역질(疫疾, 급성 전염병)이 없으며 곡식과 과실이 풍년 들게 하옵소서. 부노(父老, 나이가 많은 남자 어른)들 감탄하여 아! 신이시여. 우리를 돌보아 주시나니, 언제나 공경할지니, 속일 수 있으리오.

始祖王 誕降 1872年 癸亥 2월에 直提學 南公轍이 짓고, 本府尹 崔獻重이 글씨 및 篆字를 쓰고 本殿 參奉 朴光儉 都監 朴師魯 朴漢奎 朴夢魯가 비를 세우다. 追記 新羅紀元 1986己巳 후손 참봉 박희동이 비면의 글씨가 박락됨을 안타까이 여겨서 사재를 내어서 새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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