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주문화유산답사

미추이사금, 죽엽군(댓잎을 귀에 꽂은 병사)으로 나라를 구하다

반응형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 안에 있는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능이다. 미추왕의 성은 김씨로 신라 제12대 첨해이사금(재위 247~261)이 아들 없이 죽자 추대(윗사람으로 떠 받듬)를 받아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이 되었다.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7대 후손이며, 갈문왕(왕의 아버지, 장인, 외조부, 형제 또는 여왕의 남편 등에게 내리던 칭호로 왕과는 엄연히 구별되었지만 왕에 버금가는 높은 지위였다) 구도(신라 상대의 왕족으로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때 파진찬이 되었다. 신라 제9대 벌휴이사금 때는 좌군주가 되어 소문국을 정벌하였고, 188년과 189년에는 신라를 침공한 백제를 크게 물리쳤다)의 아들이다. 왕비는 광명부인이다. 262년에 왕이 되어 284년 승하할 때까지 23년간 재위하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백제의 침입을 물리치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죽고 난 뒤 능의 이름을 "대릉(大陵)"이라 하였다.

 

경주 미추왕릉 (慶州 味鄒王陵) (사적 제175호)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유석(무덤의 앞에 놓는 긴네모꼴의 돌로 넋이 놀게 하는 뜻으로 둔다고 함)이 마련되어 있고 입구 삼문이 있으며 이 삼문을 따라 담장이 돌려져 무덤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미추왕릉은 죽장릉·죽현릉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에 얽힌 전설로서 죽엽군(댓잎을 귀에 꽂은 병사) 이야기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유례이사금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297(유례왕 14)에 이서고국(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에 있었던 나라)이 금성을 공격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아도 쉽게 물리치지 못했다. 이 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나타났는데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고 모두 귀에 댓잎(竹葉)을 꽂고 신라군과 함께 적을 쳐서 깨뜨렸다. 그 뒤 그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하던 중 누가 죽장릉(미추왕릉)에 댓잎이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사람들은 미추왕이 신병을 보내어 싸움을 도와준 것이라고 하였다.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기이 제1, “미추왕과 죽엽군조에도 위의 내용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미추왕릉을 죽현릉, 대묘라고 하였다.

그때 홀연히 신병이 나타나 도왔는데,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우리 군사와 힘을 합해 적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는 것만 보였다. 그제서야 선왕(미추이사금)의 음덕으로 공을 세운 것임을 알고 죽현릉이라고 불렀다…왕이 나라를 지키는 공덕이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 공덕을 생각해 삼산(三山, 신라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곳으로 내림, 골화, 혈례 등 세 곳이다)과 함께 제사를 받들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서열을 오릉(혁거세거서간, 알영부인,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파사이사금의 무덤) 위에 놓아 대묘(大廟, 종묘라고도 하는데, 왕가의 신위를 모셔던 사당을 일컫는다)라 일컬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