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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골

태종무열왕, 백제 사비성 함락, 일통삼한으로 가는 길을 열다.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능이다.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으로 무덤 주위에는 무덤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에 있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위에 얹혀 있는 이수(비석의 맨 윗부분을 장식하는 머릿돌로 보통 용 문양을 새겨둔다)의 앞면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진 글귀로 인해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 중 그 주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의 이름은 춘추(春秋)로 신라 제25대 진지왕(재위 576~579)의 아들인 이찬(신라 17관등 중 두번째, 이척찬이라고도 함) 용춘(또는 용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 더보기
선덕여왕, 세 가지 일을 미리 알다.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낭산 정상에 있는 선덕여왕의 무덤이다. 외부 모습은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으로 둘레돌(무덤의 가장자리 기슭에 돌아가면서 늘어놓은 돌로 무덤의 흙이 무너져 내리 것을 막는 역할을 함)을 쌓고 다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632∼647)으로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이다. 진평왕의 큰 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 : 성스러운 여자 황제)”란 호를 올렸다. 신라에서 여자인 선덕여왕이 처음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는 특수한 왕족 신분 때문이었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서 맞춘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첫 번째는.. 더보기
신라의 신분제도, 성골과 진골 그리고 육두품 신라시대에는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분을 엄격히 구분하였는데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귀족과 일반백성을 두품제로 구분하였는데 이것을 골품제도라고 한다. 신라는 골품제도를 통해 벼슬, 결혼, 옷차림, 집의 크기, 수레 등의 규모와 장식 등 사회생활 전체에 걸쳐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신라의 국가 형성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골품제도는 6세기 초에 법으로 정해진 후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멸망에 이를 때까지 이 제도를 엄격하게 지켰다. 신라시대 골품제도에서 최고의 신분 계급은 성골과 진골이다. 특히 성골은 그 중 가장 높은 신분으로 왕족 중에서도 일부만 차지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부터 제28대 진덕여왕까지 왕들을 성골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제23대 법흥왕에서 진덕여왕에.. 더보기
국립경주박물관_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2-고운 최치원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신라를 세우고, 일구고, 가꾼 역사상의 인물들을 되돌아보는 ‘신라 역사 인물 특별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전시로 2010년에는 원효대사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미상) 특별전을 개최합니다. 최치원은 신라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이며 사상가이고 관료였습니다.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당나라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게 된 최치원은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 를 지으면서 그의 문명(文名)을 널리 떨치게 됩니다.885년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왕실에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894년에는 신라의 개혁을 위해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