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절터로 선덕여왕의 무덤이 있는 낭산 남쪽 아래에 있다. 사천왕사(사적 8호)는 2006년 4월 부터 2011년 현재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절터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탑 및 좌우경루의 건물터를 비롯하여 머리가 잘려 나간 귀부 2기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그리고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천왕 전(벽돌)은 신라에서 조각으로 유명한 양지스님의 작품이라고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절들은 모두 금당(부처님을 모신 건물) 앞에 3층 또는 5층탑 하나만을 세우는 일탑가람 형식이었으나, 통일 이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탑을 세우는 쌍탑가람 형식으로 바뀌었는데, 이 사천왕사가 쌍탑가람 형식의 최초의 절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0대 문무왕 때 중국의 당나라가 백제 멸망 후에 설치한 웅진도둑부를 신라가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중국 당나라에 있던 의상스님이 급히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문무왕은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스님은 낭산 아래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코앞에 닥치자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모자랐다. 명랑스님은 임시로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12명의 스님들과 더불어 문두루비법(불교의 교파 중 밀교에서 행하는 비법으로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외우면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고 국가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함)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당과 신라 군사들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거센 바람과 커다란 파도가 크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 후 5년 만에 절을 완성(문무왕 19년 : 679)하고 사천왕사라고 하였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의 월명스님은 신라의 노래인 향가 “도솔가”와 “제망매가”를 지었는데, 이 곳 사천왕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월명스님은 피리를 잘 불었는데,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면 그 소리에 지나가는 달이 멈출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신라 사람들은 월명스님이 살던 사천왕사 앞 동네를 월명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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