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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유산답사

마애보살삼존좌상, 머리에 모자를 쓴 불상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중생사라는 절이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중생사는 아니며 근래에 세워진 절이다. 대웅전에서 서쪽으로 50m 떨어진 누각 안쪽 바위 면에 세 분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바위 면이 거칠어지고 금이 많이 가 있는 상태이다. 가운데 새겨진 보살상은 지장보살로 두광(머리광배)과 신광(몸광배)을 모두 갖추고 있다. 머리에는 두건(머리에 쓰는 헝겊으로 된 간단한 모자)을 쓴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보살상의 좌우 양쪽에 새겨진 조각상들은 지금은 그 모습이 자세히 남아 있지 않지만 갑옷을 입고 손에는 무기를 들고 악귀를 쫓아내는 신장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중생사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 말에 최은함이라는 사람이 중생사의 대비상 앞에.. 더보기
능지탑, 문무대왕의 화장터(火葬址) 고문의 바깥 뜰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 서쪽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건축물로 능지탑 또는 연화탑으로 불리어 왔다. 아래 쪽 기단 4면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 중 남쪽면의 뱀, 동쪽 면의 호랑이, 용이 새겨진 조각은 없어지고 현재는 9구의 조각상만 남아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은 “내가 죽은 후 열흘 안에 고문 바깥뜰에서 인도식으로 불로 화장하라”고 유언을 하였는데, 능지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었고, 1975년 해체, 발굴조사 때 주변 지층이 까맣게 거슬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짐작하고 있다. 문무왕의 유조(임금의 유언), 『삼국사기』권 제7 신라본기 제7 21년 가을 7월 1일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 더보기
황복사, 신라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던 곳 황복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낭산 동쪽 기슭에 있는 절터로 3층 석탑과 2기의 귀부(비석을 세워 두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가 남아있고 금당터로 여겨지는 곳에 12지신상(열 두해 띠를 상징하는 동물신상)조각이 묻혀 있다. 절을 세운 사람과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의상(625~702)대사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절이라는 기록으로 볼 때 신라 제27대 선덕여왕(632~647) 이전에 이미 절이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황복(皇福)”이라는 절 이름을 통해 신라왕실의 복을 빌던 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43년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2층 몸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국보 79호인 금제여래좌상과 국보 80호인 금제여래입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더보기
보문사, 보문동 절터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일제 강점기 때 이곳에서 “보문사(普門寺)”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보문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이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 제48대 경문왕(861~875) 11년(871)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모두 논으로 바뀐 이 곳 절터에는 금당(절의 본 건물로 부처님을 모셔둔 곳), 동서목탑 등의 건물터와 석조(큰 돌을 파서 물을 부어 쓰도록 만든 기구), 당간지주 2기와 초석(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석등(돌로 만든 등) 조각 등이 남아 있다. 보문사터 북쪽에 세워져 있는 이 당간지주의 양 기둥 가운데 북쪽의 기둥은 윗부분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3개의 구멍이 나 있는 남쪽 기둥.. 더보기
진평왕, 하늘이 내린 옥띠를 받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능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아래쪽 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무덤의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 쌓은 돌)을 둘렀는데, 지금은 몇 개만 남아 있다. 진평왕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백정이다.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이며, 왕비는 마야부인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신기하고 키가 크고, 똑똑했다고 한다. 작은 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신라 때에,진골 이상의 귀족들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회의 제도로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찬성해야 중요한 내용이 통과되는 만장일치제임)에 의해 왕에서 쫓겨나자 왕위에 올랐다. 진평왕은 56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을 굳게 세우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들을 만들었다. 관리들의.. 더보기
신라의 신분제도, 성골과 진골 그리고 육두품 신라시대에는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분을 엄격히 구분하였는데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귀족과 일반백성을 두품제로 구분하였는데 이것을 골품제도라고 한다. 신라는 골품제도를 통해 벼슬, 결혼, 옷차림, 집의 크기, 수레 등의 규모와 장식 등 사회생활 전체에 걸쳐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신라의 국가 형성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골품제도는 6세기 초에 법으로 정해진 후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멸망에 이를 때까지 이 제도를 엄격하게 지켰다. 신라시대 골품제도에서 최고의 신분 계급은 성골과 진골이다. 특히 성골은 그 중 가장 높은 신분으로 왕족 중에서도 일부만 차지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부터 제28대 진덕여왕까지 왕들을 성골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제23대 법흥왕에서 진덕여왕에.. 더보기
천마총, 자작나무 껍질 말다래에 그린 천마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 안에 있는 신라시대의 왕릉으로 추측하고 있는 고분으로 둘레 47m, 높이 12.7m에 달하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1973년 문화재관리국은 황남대총을 발굴조사 하기 위한 예비조사로 발굴을 하였는데, 발굴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자작나무껍질에 채색으로 천마를 그린 말다래(장니:국보 제207호)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천마총에서는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천마총에서 발굴된 유물들 가운데 천마도는 말의 양쪽 배를 가리는 가리개로, 말이 달릴 때 튀는 흙이나 먼지를 막는 역할을 하며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더보기
미추이사금, 죽엽군(댓잎을 귀에 꽂은 병사)으로 나라를 구하다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 안에 있는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재위 262~284)의 능이다. 미추왕의 성은 김씨로 신라 제12대 첨해이사금(재위 247~261)이 아들 없이 죽자 추대(윗사람으로 떠 받듬)를 받아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이 되었다.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7대 후손이며, 갈문왕(왕의 아버지, 장인, 외조부, 형제 또는 여왕의 남편 등에게 내리던 칭호로 왕과는 엄연히 구별되었지만 왕에 버금가는 높은 지위였다) 구도(신라 상대의 왕족으로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때 파진찬이 되었다. 신라 제9대 벌휴이사금 때는 좌군주가 되어 소문국을 정벌하였고, 188년과 189년에는 신라를 침공한 백제를 크게 물리쳤다)의 아들이다. 왕비는 광명부인이다. 262년에 왕이 되어 284년 승하할 때까지 23년간 재위.. 더보기